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3세 (문단 편집) === 프랑스 국왕 즉위와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 앙주 공작 앙리가 부재중인 사이, 샤를 9세와 막내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다투자 많은 위그노들이 보호와 지지를 구하면서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574년 2월에 '''생 제르망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목적은 궁정에 억류된 나바르 왕 앙리와 콩데 공 앙리의 구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북부의 [[노르망디]], 서남부의 [[보르도]] 등지에서 위그노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이 다시 재개되었다. 앙주 공작 앙리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 지 3개월 후인 1574년 5월 30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로 큰 충격을 받아 와병 중이었던 형 샤를 9세가 사망하자 왕태후 카트린이 앙주 공작 앙리가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에 취임한다고 선언했다. 앙리는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중이었던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위해 6월 18일, 프랑스로부터 같이 동행했던 측근들과 함께 모의해 미련없이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급히 서둘러 크라쿠프 바벨 성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신성 로마 제국의 [[모라비아 변경백국|모라바 변경백령]]에 도착한 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빈(오스트리아)|빈]]으로 가 [[막시밀리안 2세]]의 환대를 받고, 가톨릭 세력권인 남부 독일을 경유해 [[베네치아 공화국]], [[만토바]], [[페라라]] 등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유람하는 듯이 거치면서 [[사보이아 공국]]의 [[토리노]]를 경유해 9월 2일 [[샹베리]][* 현재는 프랑스령이나 당시에는 사보이아 공국 영토였다.]에 도착하여 동생 프랑수아와 합류하고, 이어 9월 6일 [[리옹]]에 도착, 모후 카트린과 만났다. 귀국한 앙리는 랑그도크 지방 총독이던 몽모랑시 당비르의 배반에 직면했다. 불만파(폴리티크파)에 속했던 당비르는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와 결탁하고 발루아-앙굴렘 왕실에 등을 돌렸다. 1575년 2월 21일 [[랭스]]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후, 앙리 3세는 이틀 뒤 로렌 가문의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했다. 이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그가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앙리 3세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새로운 국왕 선거를 치러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바토리 이슈트반을을 선출했고, 그가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스테판 바토리]][* 이 사람의 여동생 언너가 그 악명높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로 즉위하였다.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 이전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원래 그는 똑똑하고 지적이었으며 세련된 성격이라 모후 카트린이 매우 총애했는데,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Les Mignons)'이란 불린 총신들에 대한 지나친 총애, 동성애적인 성적 취향, 조각배를 타고 강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의 기이한 행각, 그리고 과도한 사치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또 카트린과 더불어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즉위 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프랑스 전역을 다시 종교전쟁의 대혼란으로 몰고 갔다. 앙리 3세는 1575년 4월에 협상을 모색했지만 9월에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파리의 궁정에서 탈출, 자신의 영지 내에 위치한 드뢰로 도망쳐, 지지자들을 모은 후 폴리티크파의 두목이 되어 가톨릭계 신성동맹의 수장인 3대 기즈 공작 앙리 1세 드 로렌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6세]]의 동생 요한 카지미르까지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4,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해 들어오자 앙리 3세는 황급히 프랑수아와 7개월간의 휴전을 협상하여 독일 침략군을 라인 강 동부에 묶는 조건으로 500,000 리브르의 지불을 약속했지만 화평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1576년 2월 3일에 나바르 왕 앙리와 그의 사촌동생인 콩데 공 앙리 드 부르봉이 파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부인하고, 다시 위그노로 복귀하며 나바르의 베아른에서 다시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3월에 앙리 3세는 알랑송 공 프랑수아와 위그노측의 조건을 받아들여 '왕제 전하(王弟殿下)의 화친'이라고 불린 '''<볼리유 칙령>'''을 공표했다. 이 칙령으로 수도 파리 성벽 내외의 모든 장소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식적인 예배가 인정되었고, 위그노의 안전보장도시가 8개로 늘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